유소년기
그의 유소년기는 한마디로 적빈(赤貧)의 시기였다. 집안의 형편은 말할 것도 없고 국운마저 고난과 시련의 시기였다. 그의 조부 때만 하여도 한 해의 수확량이 500섬을 웃돌았던 가세가 식민지화로 인하여 기울기 시작한데다 설상가상으로 뜻밖의 송사(訟事)에 휘말리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강석진 선생은 어린 시절 극도의 빈곤 속에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로부터 참참이 배운 약간의 한학적 지식 외에는 이렇다할 교육도 변변히 받지를 못하였으며 보통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였다. 호구(糊口)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느 때는 아버지를 따라 외가에 잠시 머물기도 하고 더러는 출가한 누님 댁에 얹혀 지내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오는 동안 소년 강석진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나이 15살 되던 해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대도시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고 묵을 곳이 없는 그였지만 그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이 지금의 유명한 가구점 거리인 부산 동구 좌천동의 어느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가구점이었고, 그 집에 심부름꾼 겸 견습공으로 일을 하게 되어 당장의 숙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의 근면·성실함과 타고난 손재주가 밑천이 되어 차츰 점주의 신임을 얻게 되고 선배 기술자들의 목공 기능과 기술을 어깨너머로 보고 스스로 익혀나가면서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너덧 해 동안에 가구 제작의 기능과 기술은 일취월장으로 발전하게 되고 워낙이 성실하고 솜씨도 뛰어나 주인으로부터는 칭찬과 함께 선배 기술자들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와 임금인상으로 때로는 부러움과 더러는 미움과 시샘을 받기도 하였다. 한푼 두푼 모은 돈이 4·5년을 지나고 보니 그로서는 수월찮은 돈이 되었고 기술도 웬만큼의 기술자 뺨칠 정도가 되자 어떻게 하든 내 손으로 사업을 경영하여 돈을 벌어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자신의 공장을 세우기로 마음 먹고 일하여 오던 일인 가구점과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조그마한 가구 점포를 겸한 제재소를 내어 동명제재소란 간판을 달게 되었으니 이때가 1925년, 그의 나이 아직 약관(弱冠) 스무살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이처럼 그의 유소년기는 가난과 주림의 시기요, 고난과 시련의 시기로써 그의 생애에 있어서 적빈(赤貧)의 시기였다.
(동명대학교 동명관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