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앞일을 훤히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강석진 회장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구상할 때 결코 성급히 서두르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남의 말에 솔깃하거나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다. 혼자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일단 승산이 있다고 판단이 서면 앞뒤 돌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간다. 그리고 그 일이 당장에는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 여건이 불리하고 부적하여 난관이 있다해도 장래의 전망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란 판단이 서면 주변 누구의 만류에도 구애받지 않고 일을 추진했다.
범일동(현 부산 상공회의소 주변 일대)에 있던 동명목재 상사로는 현재의 수요와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 볼 때 한계성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전후복구사업을 염두에 둔다면 목재와 합판의 폭발적인 수요는 필연적이라 판단한 그는 이의 대비책으로 시설 설비 외 확충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힌 다음 부지 물색에 나섰다. 주로 동남아지방에서 수입되는 원목의 적재문제나 물류비의 절감 등을 고려할 때 임해(臨海)지역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 당시에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용당의 한적한 포구 주변의 땅과 야산을 한 필지, 두 필지씩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예견은 어김없이 적중하여 대지 60여만평 연건평 5만여평의 단일품목 생산공장으로서는 그 규모가 세계 제일이라는 남구 용당동의 동명목재상사를 세우게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강석진 회장은 매사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며 사업을 구상하여 기업을 경영해 나갔다. 다시 말하면 강석진 회장은 먼 앞일을 내다 볼 줄 아는 혜안(慧眼), 곧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소유자였다.
용당동 부지에 세워진 생산공장의 건물은 모두 강석진 회장이 손수 설계한 것으로 여러 동의 공장건물이 하나같이 필요 이상으로 높은 것이 특색이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강석진 회장의 생각은 먼앞날의 일을 염두에 둔 의도적 설계였다. 인간사 모두가 그러하듯 앞으로 50년, 100년 세월이 지나가면 문화는 발달하고 인간의 삶의 형태도 변하기 마련으로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의 양태가 변할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니, 건축자재인들 변하지 않겠는가, 이미 나이론이 나오고 합성섬유가 개발되어 명주, 무명, 삼배의 방적산업이 사양화되고, 우리 가정의 놋그릇이 스테인레스로 바뀌는 판에 합판과 목재만이 건축자재의 전부일 수는 없는 일로 언젠가는 합판산업도 사양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그때 공장내부의 기계를 철거하면, 이 건물은 그대로 항만 부둣가의 더없이 좋은 보세창고로 전용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공장 건물의 공간을 턱없이 높게 설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동명불원의 창건과 더불어 불원을 중심으로 한 용당동 일대를 부산의 교육, 문화 관광의 중심지로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포부는 80년 5월의 사태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구상과 입안의 타당성이 인정되어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 그리고 각급 공공기관들이 서둘러 사업을 시작하여 기존의 U.N기념공원을 포함,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립 박물관이 들어서고 초·중·대학 등 각급 학교와 특수교육기관이 세워져 명실 공히 부산의 교육 문화 관광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찬탄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